2025. 3. 19. 19:25ㆍ명상&쉼터/소소한삶
어느 날 아침, 화장실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양치를 하던 중 문득 눈길이 유난히 많이 보이는 흰머리에 멈추었다. 은빛 실타래가 검은 밤하늘에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젊은 시절엔 머리카락이 검은 강물처럼 흘러내리던 그 자리에, 이제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손가락이 저절로 머리 쥐고 당기며 '아직은 아닌데'라는 생각에 상년에 잠긴다 . 그 순간 거울 속에서 스무 살의 내가 조롱하듯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오르다
40대 어느 생일날 아내가 선물한 핸드폰 거울 케이스가 기억난다. 새하얀 티타늄 프레임에 각인된 'Forever Young'이라는 문구가 유치하게 느껴져 웃었던 그날. 지금 그 케이스를 들여다보면 금속 표면에 굴곡진 주름이 새겨져 있다. 마치 내 이마에 파인 시간의 골짜기처럼.
예전엔 동문회를 나가면 끝자리에서 선배들의 시중을 열심히 들었다. 그런데 어느새 후배들이 일어서며 "선배님, 여기 앉으세요"라고 말을 건넨다. 후배들의 시선 속에선 늙어 버린 선배의 세월만을 보는 것만 같았다.
청춘의 유토피아, 그리고 그 후
대학로 공연장에서 연극을 보던 날들. 친구들과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을 바꿀 계획을 세우던 우리는, 이제 각자 집안의 경조사 소식을 전하며 만난다. '자녀 결혼식, 장례식' 이 우리의 모임을 점령했다. 만남이 있으면 필히 헤어짐이 있으며, 탄생이 있으면 죽음도 있다는 것은 엄연한 자연의 섭리거늘 뭐가 그리도 아쉬운지!
그러나 노년의 삶이 청춘의 열정을 앗아간 것은 아니다. 지난주 문방구에서 우연히 발견한 수채화 도구 세트를 사들고 와서, 삼십 년 만에 붓을 들어 보았다. 물감이 종이 위에 퍼지는 순간, 손끝에서 일렁이던 열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첫 작품은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흥분은 스무 살의 감정과 다르지 않았다.
황혼이 건네는 두 번째 티켓
요즘은 아침 산책길에 새로 생긴 커피숍에 들른다. 젊은 바리스타가 추천하는 신메뉴를 주문하며 "이게 무슨 맛이죠?" 묻는 게 새삼스러운 즐거움이다. 지난주엔 핸드드립 클래스에 등록했다가 손떨림 때문에 커피를 쏟아 황당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실패조차 새로움을 배우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청춘 시절의 좌절감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펼친 시집 한 구절이 가슴에 와닿았다. '노년은 인생의 가을이 아니라 두 번째 봄의 시작이다.' 문득 서재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서류들이 보였다. 합격 통지서와 임용장들 그러나 이제는 그 화려한 과거와 이별을 진짜로 할 시간인 것이다. 새로운 꿈을 심을 때인 것 같다.
석양 너머로 보이는 새벽
오늘 아침에도 거울 속의 백발을 보며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은빛을 감추려고 검은색 염색약을 찾기보다, 햇살에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단정히 빗어 넘긴다. 세월이 선물한 은관(銀冠)을 쓰고 나선 거리에서, 청춘의 내가 부러워하던 품격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한다.
동네 공원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청년들을 바라보노라면 미소가 지어진다. 그들의 발걸음에 실린 초조함과 희망이, 내 안에서도 여전히 뛰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는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멈추지 않는 걸음으로 인생의 두 번째 막을 걸어가려 한다. 황혼이 지는 하늘은 새벽을 품고 있음을, 한때 청춘이었던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거울 속의 내가 오늘도 조용히 눈짓한다. "아직 놀 때가 아니야"라고. 내일의 나를 위해, 오늘의 나는 한 걸음씩 새로움을 밟아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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