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16. 11:13ㆍ명상&쉼터/소소한삶
부모라는 이름의 별
어릴 적 할머니는 밤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저기 저 별들은 이미 죽은 지 오래지만, 그 빛은 아직도 우리에게 닿고 있단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빛이 도달하는 데 수억 년이 걸린다는 별의 신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부모란 바로 그러한 존재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순간들 속에서도 영원히 타오르는 별빛처럼, 그들의 사랑은 시간을 관통하여 우리 삶 구석구석에 스며든다. 새벽 닭이 울기 전부터 부엌을 밝히는 불빛처럼, 비 오는 날 등하교길에 몰래 들려주던 우산 하나처럼,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영원한 빛이 되어 있었다.
첫 번째 숨을 나눈 사람들
우리가 세상에 내뱉은 첫 숨은 사실 부모의 숨이었다. 산실에서 엄마가 내밀었던 팔뚝의 깊은 상처 자국, 아빠가 출근길에 뛰어들었던 눈물 겨운 택시 요금,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호흡과 함께 섞여 있었다. 그들은 한평생을 '나'라는 이름의 화로에 장작을 던져넣는 일로 보냈다. 추운 겨울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듯, 영혼의 온기를 조금씩 나눠주었다.
어린 시절 나는 아빠의 지갑이 마법 상자라고 생각했다.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어도 사탕이 나타났고, 조금만 졸라보면 뜨거운 호떡이 손안에 쏙 들어왔다. 훗날 그 지갑을 열어보니 구겨진 영수증과 할부 계약서만 가득했다. 아빠는 평생을 자신의 욕심을 접어서 지갑에 넣고, 대신 내 꿈을 채워 넣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흉터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놀다가 늦게 들어온 날이 있었다. 문틈으로 스며든 빛을 따라 가보니 엄마는 식탁에서 잠든 채로 손바닥 위에 시계를 올려놓고 있었다. 새벽 2시까지 매 10분마다 눈을 떠서는 시곗바늘을 확인하던 그 습관은, 내가 대학에 떠난 후에도 수년째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의 걱정은 자식이 떠난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계속해서 고통스러워하는 법이다.
그들은 절대 '희생'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아빠의 허리가 휘어져 가는 것도, 엄마의 눈가에 깊게 패인 주름도 모두 '기쁨'이라고 우긴다. 가난했던 시절 나를 업고 계단을 오르던 아빠의 등에 맺힌 땀방울이, 지금은 내 등에 맺힌 사회생활의 어려움을 닦아주는 손수건이 된다는 사실을 나는 언제 깨달았을까.
시간을 거슬러 오는 편지
신혼여행을 마치고 본가에 인사를 갔던 날던 날, 엄마는 서랍 깊숙이 숨겨두었던 노트를 건넸다. 첫돌 무렵부터 지금까지 매년 생일에 써둔 편지들이 빼곡했다. "오늘 우리 아들이 결혼을 했을까? 아직 25년이나 남았지만 벌써부터 가슴이 뛰네." 편지지 위에 떨어진 물방울 자국들이 햇살에 반짝였다. 부모의 사랑은 시간을 초월한 예언이었다.
이제야 깨닫는다. 매일 전화로 늘어지는 잔소리가 사실은 "네가 보고 싶다"는 고백이었음을, 용돈을 건네며 웃는 얼굴이 "네가 행복하면 돈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는 선언이었음을. 그들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 걷다 보니, 내 인생의 모든 길목에 그들이 심어둔 버드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영원한 항해의 닻
우주를 떠도는 우주선이 지구를 향해 신호를 보내면, 그 메시지는 수십 년 후에나 닿는다. 부모의 마음도 그렇다. 오늘 내가 던진 무심한 한마디가 그들의 심장에 꽂힌 화살이 되어, 20년 후 내 아이를 안고 있는 내 품에서야 비로소 피어나리라는 것을.
이제 내게도 흰 머리카락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거울 속에서 아빠의 미소를 발견하는 순간, 나는 비로소 이해한다. 부모란 끝없는 사랑의 연쇄반응이라는 것을. 그들이 나에게 준 생명의 횃불을, 이제 내가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야 할 사명이라는 것을.
별빛이 시공을 뚫고 우리에게 도달하듯, 부모의 사랑은 세대를 넘어 영원히 맥박칠 것이다. 그들이 이 땅을 떠난 후에도, 우리가 숨 쉬는 한 그들은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단지 보이지 않을 뿐, 결코 사라지지 않는 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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