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것

2025. 3. 17. 17:31명상&쉼터/소소한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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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달빛이 창가에 어릴 때면, 나는 사랑을 생각한다. 달은 태양의 빛을 빌려 세상을 은은히 비추지만, 태양을 독차지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둠이 깊어질수록 더 밝게 빛을 내뿜는다. 사랑이란 이와 같지 않을까. 타인의 빛을 빛내기 위해 내 몸을 태우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라 믿는다.

 

소유의 환상 속에서
우리는 종종 사랑을 ‘소유’로 오해한다. 연인의 손을 꼭 잡아야만 안심하고, 가족의 모든 선택을 통제해야만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쥐고 흔드는 주먹이 아니라,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 허공에 맡기는 연습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사과나무는 열매를 쥐어짜지 않아. 뿌리에 물 주고 햇빛 보태주면 알아서 열린다.” 사랑 역시 그런 것. 사랑하는 이의 삶을 내 그림자로 가리지 않을 때, 비로소 그 빛은 온전히 피어난다.

 

역사가 증명하는 사랑의 형태
기원전 399년, 독배를 들이키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사랑의 한 형태였다. 진리를 사랑한 그는 제자들에게 “너희 자신을 돌보라”는 유언을 남겼다. 죽음으로써 깨우침을 전한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저들을 용서하소서”란 외침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렸지만, 그 희생이 오히려 수천 년을 견딜 힘을 남겼다. 죽음이 사랑의 종착역이 아니라, 영원을 여는 통로였던 셈이다.

 

어머니의 가위
고등학교 시절, 교복 단추를 잃어버린 날이었다. 새벽 3시에 화장실에 갔다가 어머니의 방문 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았다. 책상 위에 펼쳐진 교복과 손길이 부르트게 닳은 가위. 단추 구멍을 넓히던 어머니의 등이 유난히 작아 보였다. 그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어머니는 매일 같은 희생을 반복했지만, 결코 그것을 ‘희생’이라 부르지 않으셨다. “엄마는 네가 행복하면 그걸로 족해.” 그 말씀 속에 사랑의 본질이 있었다. 사랑은 계산기 위에 올라탄 숫자가 아니다. 주는 것 자체가 충분한 보상인 법.

 

행복의 역설
사랑할 때 우리는 ‘나’를 버린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 순간 가장 완전해진다. 마치 강물이 바다에 흘러들어가 비로소 넓음을 깨달으듯. 한 노신사가 말했다. “아내가 떠난 후에야 사랑을 알았소. 그땐 내가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녀가 이 바라던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 사랑은 이기심을 녹여 공동체의 그릇을 만든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오히려 삶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는 아이러니다.

 

죽어도 좋아
그 말은 결코 죽음을 갈구하는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할 만큼 소중하다’는 고백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한 시간이 이미 죽음을 이길 만큼 강력했음을, 눈 내리는 날 카페에서 손을 잡았던 그 온도가 여전히 손금에 남아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사랑은 시공을 초월하는 현재진행형이다. 죽음은 그 사랑을 멈추지 못한다. 왜냐면 진정한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순간 영원히 ‘나’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은
버려야 할 것과 붙잡아야 할 것을 가르는 칼날 같은 분별력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내일의 나를 내던지는 용기이자, 동시에 그들의 내일을 위해 오늘의 나를 사르는 지혜다. 달이 태양의 빛을 거둬들이지 않듯, 사랑은 빛의 근원을 묻지 않는다. 그저 비출 뿐이다. 어둠이 드리울 때일수록 더욱 더.

 

 

https://youtu.be/MfJllFUR4vU?si=CAFLMvxGgfN8F2i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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