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쉼터/소소한삶(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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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두 번째 봄
어느 날 아침, 화장실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양치를 하던 중 문득 눈길이 유난히 많이 보이는 흰머리에 멈추었다. 은빛 실타래가 검은 밤하늘에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젊은 시절엔 머리카락이 검은 강물처럼 흘러내리던 그 자리에, 이제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손가락이 저절로 머리 쥐고 당기며 '아직은 아닌데'라는 생각에 상년에 잠긴다 . 그 순간 거울 속에서 스무 살의 내가 조롱하듯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오르다40대 어느 생일날 아내가 선물한 핸드폰 거울 케이스가 기억난다. 새하얀 티타늄 프레임에 각인된 'Forever Young'이라는 문구가 유치하게 느껴져 웃었던 그날. 지금 그 케이스를 들여다보면 금속 표면에 굴곡진 주름이 새겨져 있다. 마치 내 이마에 파..
2025.03.19 -
물질적 사랑이 최고인 시대에 부치는 희망의 단상
이 시대의 사랑은 유리로 된 성처럼 반짝인다. 광고 속 백화점 쇼윈도에는 사랑의 증표로 홍보되는 명품 가방이 진열되고, SNS에는 연인에게 선물한 고가의 시계 사진이 넘쳐난다. "돈이 사랑을 증명한다"는 속삭임이 도처에서 메아리친다. 그러나 이 빛나는 유리 조각들 사이로 스민 균열을 보았는가? 물질적 풍요가 사랑의 깊이를 대체할 수 있다는 착각, 그 이면에 놓인 정서적 황폐함에 대한 회의가 서서히 고개 든다. 최소한 내가 청춘이었던 그때는 물질보다는 정신을 더 중요 시하던 시대였다. 캠퍼스에서 니체를 이야기하고 없어도 행복했던 그 시절. 돌아 갈 수는 없어도 잊을 수는 없다. 소비주의가 만든 '사랑의 표준화21세기의 사랑은 자본의 논리에 포획당했다. 연인들이 데이트 코스로 고급 레스토랑과 명품 매장을..
2025.03.18 -
사랑한다는 것
사랑이란달빛이 창가에 어릴 때면, 나는 사랑을 생각한다. 달은 태양의 빛을 빌려 세상을 은은히 비추지만, 태양을 독차지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둠이 깊어질수록 더 밝게 빛을 내뿜는다. 사랑이란 이와 같지 않을까. 타인의 빛을 빛내기 위해 내 몸을 태우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라 믿는다. 소유의 환상 속에서우리는 종종 사랑을 ‘소유’로 오해한다. 연인의 손을 꼭 잡아야만 안심하고, 가족의 모든 선택을 통제해야만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쥐고 흔드는 주먹이 아니라,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 허공에 맡기는 연습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사과나무는 열매를 쥐어짜지 않아. 뿌리에 물 주고 햇빛 보태주면 알아서 열린다.” 사랑 역시 그런 것. 사랑하는 이의 삶을 내 그림자로 가리..
2025.03.17 -
부모라는 이름의 별
부모라는 이름의 별 어릴 적 할머니는 밤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저기 저 별들은 이미 죽은 지 오래지만, 그 빛은 아직도 우리에게 닿고 있단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빛이 도달하는 데 수억 년이 걸린다는 별의 신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부모란 바로 그러한 존재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순간들 속에서도 영원히 타오르는 별빛처럼, 그들의 사랑은 시간을 관통하여 우리 삶 구석구석에 스며든다. 새벽 닭이 울기 전부터 부엌을 밝히는 불빛처럼, 비 오는 날 등하교길에 몰래 들려주던 우산 하나처럼,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영원한 빛이 되어 있었다.첫 번째 숨을 나눈 사람들우리가 세상에 내뱉은 첫 숨은 사실 부모의 숨이었다. 산실에서 엄마가..
2025.03.16 -
영화배우 김새론의 죽음을 보며
영화배우 김새론의 죽음을 보며 세상은 때로 예고 없이 충격을 안긴다. 어느 날 아침, 스마트폰 화면을 가득 채운 한 줄의 속보 -“배우 김새론, 향년 25세로 별세”- 는 수많은 이들의 숨을 멎게 했다. 허망함과 부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입을 모아 “왜?”라고 묻는다. 그녀는 영화 에서 통통한 볼에 천진난만한 눈빛으로 여주인공을 연기했던 그 소녀였다. 어린 나이에 스크린을 장악한 재능, 성인 배우로의 성공적인 전환, 그리고 꾸준히 이어온 연기열정.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과거형’이 되어버린 현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빛나던 별들의 죽음그녀의 죽음은 단순히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우리 시대가 낳은 ‘유명(有名)의 역설’을 드러낸다. SNS 시대, 연예인은 더 이상 작품 속 캐릭터가 아닌..
2025.03.14 -
그녀의 빈 자리
그녀의 빈 자리 유튜브 알고리즘은 마치 내 마음의 구멍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이문세의 '옛사랑'이 흘러나올 때마다 화면 속 가로수 길은 내 어깨 너머로 스며든 겨울 햇살과 겹쳐진다. 목소리는 오래된 편지처럼 종이결을 타고 내려오고, 피아노 선율은 창밖에 서리처럼 앉아 있다. 손가락이 멈춘 채, 나는 그 빈 자리를 본다. 스크린에 비친 내 흐릿한 얼굴 뒤로, 오래전 그녀의 그림자가 스치는 순간이다. 교실 창가에 앉았던 그녀는 언제나 지우개 가루를 털듯 가볍게 웃었다. 봄바람이 책장을 넘기면 머리칼이 나뭇가지처럼 흔들렸고, 종이 비행기처럼 날아온 메모에는 “오늘도 안경닦아줄게”라 써 있었다. 그 시절 사랑은 소풍 도시락처럼 소박했다. 빵 껍질을 몰래 내 접시에 올리던 손가락, 체육관 뒤 계단에서 나눈 핸드..
2025.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