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20. 21:02ㆍ명상&쉼터/소소한삶
햇살이 창가에 기대어 책장을 넘기던 어느 가을 아침,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 평온한 순간이 행복일까?” 어린 시절 할머니의 품에서 맛본 따뜻한 호박죽, 첫사랑과 나눈 수줍은 미소, 아이를 처음 안았을 때 손끝으로 전해진 작은 체온…….
그 모든 순간들은 분명 ‘행복’이라 불릴 만했으나, 어느새 그 감각들은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행복은 왜 이렇게 덧없이 스쳐 지나갈까.
행복은 유리구슬처럼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행복을 쫓는다. 어린아이는 장난감 하나에 눈을 빛내고, 청년은 꿈을 이루려 발버둥치며, 노인은 건강한 아침을 소망한다. 그러나 정작 원하는 것을 얻으면 새로운 욕망이 꼬리를 문다. 마치 유리구슬을 손에 쥐었을 때 반짝이는 빛에 홀리지만, 막상 쥐어보면 차갑고 매끄러운 질감만이 남는 것처럼.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모순을 논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삶의 목적”이라 했고, 스토아 학파는 “욕망을 끊어야 평안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론은 실천보다 쉽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한다. SNS 속 화려한 타인의 삶, 경제적 성공을 강요하는 사회의 잣대, 나이 들어감에 따른 상실감…….
우리는 비교와 좌절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행복의 적은 ‘영원’이다
“내일이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
“은퇴하면 모든 게 좋아지겠지.”
우린 종종 행복을 미래의 어떤 조건과 결부시킨다. 그러나 막상 그 조건이 충족되어도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구름을 잡으려는 아이처럼, 행복은 손가락 사이로 스민다. 문제는 행복을 ‘완성된 상태’로 여기는 착각이다.
영원히 변치 않는 행복을 바라는 순간, 우리는 현재의 작은 기쁨까지 외면하게 된다.
한 노년의 예술가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있습니다. 완성된 작품을 바라볼 때가 아니라, 붓을 들어 캔버스에 색을 묻힐 때 제 심장이 뛰는 걸 느껴요.” 그의 말처럼, 행복은 동사다.
‘가지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 ‘추구하는 것’ 그 자체에 가깝다.
상처는 행복의 그늘이다
행복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종종 그 반대편을 외면한다. 슬픔, 분노, 외로움……. 그러나 어둠이 없으면 빛도 의미가 없듯, 고통 없는 행복은 피상적이다. 소설가 헤밍웨이는 이렇게 썼다. “세상은 모두를 부수려 한다. 부서지지 않은 자는 뒤에 가서 더 심하게 부서진다.” 고통은 인간을 취약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깊이를 준다.
병상에서 아버지의 손을 잡았을 때, 나는 비로소 이해했다. 그의 주름진 손은 실패와 굴욕, 사랑과 이별의 흔적이었다.
그 순간 나는 그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았지만, 그가 살아낸 시간 앞에서 숙연해졌다. 행복이란 아픔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 그 무게를 견디며 여전히 세상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일지 모른다.
타인의 행복이 내게로 스미는 순간
어느 날 지하철에서 우연히 들은 할머니의 대화가 떠오른다.
“우리 애가 커피 한잔 사준대. 그게 다인데 왜 이렇게 기쁠까?”
단순한 말투 속에 스민 감동이 있었다. 행복은 때론 남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데서 오기도 한다.
이기적 유전자 이론을 주장한 리처드 도킨스도 인정했다. “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건 이타주의 덕분이다.”
배려, 공감, 소통……. 우리는 연결고리 속에서 비로소 온전해진다.
영화 〈인턴〉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맡은 벤은 은퇴 후 힘든 현실 속에서도 주변인을 위해 작은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행복은 성공이나 재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유대감에서 우러났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만, 함께라면 작은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도 묻는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한참을 살아온 나에게 행복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다만 이제는 그 답을 찾으려 애쓰지 않는다. 아침에 핀 진달래를 보며 “오늘은 꽃이 피었구나” 하고 중얼거리는 것, 블로그에 모르는 누군가가 감사의 댓글을 달았을 때, 오랜 친구와 통화하다 문득 터진 웃음……. 그 모든 것이 행복의 파편이다.
사람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영원한 행복을 갈망한다. 하지만 유한함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현재의 빛을 볼 수 있다.
시인 릴케는 말했다. “인생의 답을 사랑하라. 그 자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될 테니.” 행복 역시 마찬가지다. 정의내리지 못해도, 끝까지 풀리지 않는 숙제라 해도, 우리가 묻는 행위 자체가 삶을 살아있게 한다.
질문의 끝에서 피어나는 것
행복은 강물과 같아서 잡으려 할수록 흘러간다. 그러나 그 물살에 몸을 맡기면 저절로 떠밀려 갈 수 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평생 고민하다 떠나는 이 세상.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도 묻는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하고.
아마 그 질문을 멈추는 날, 비로소 삶의 막이 내릴 테지만 - 지금 이 순간, 질문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행복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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