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w yourself

2025. 5. 29. 10:00명상&쉼터/인생명언

반응형

"너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이 말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압축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을

마치 명상 센터 광고문구처럼 가볍게 사용한다.

'자기 계발'과 '성찰'이 유행하는 시대에,

진정한 자기 인식은 오히려 사라졌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앎'은 단순한 취향 파악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무지의 고백이 진짜 앎이다

 

아테네 시장에서 청년들을 붙잡고

"의(義)란 무엇인가?"라고 묻던 소크라테스는

결코 답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방의 모순을 들추어내며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만 안다"고 고백했다.

 

현대인은 반대로 행동한다.

SNS에 '나를 소개합니다'란

글을 쓰며 자신을 규정하지만,

실상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포장이다.

 

진정한 자기 인식은 '나는 누구인가'보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과정이다.

 

 

1787년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 침대에 등 돌리고 고개 숙여 앉아 있는 사람이 수제자인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무릎에 손을 얹은 이가 ‘절친’인 크리톤이다

 

자기기만의 덫

 

우리는 '나를 알기 위해' MBTI 검사를 하고,

유튜브 강의를 듣지만,

이는 편향된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갇힌 자기 확인에 불과하다.

 

소크라테스가 경계한 것은 바로 이런 '착각된 확신'이었다.

"내가 옳다"고 고집할 때,

우리는 스스로의 한계를 외면한다.

 

오히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의심이 진짜 성찰로 이어진다.

최근 '내 편'과 '네 편'으로 갈라져 싸우는 사회적 분열은,

자기 검증을 거부한 집단적 무지의 결과다.

 

 

삶의 실험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알지 못하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현대인에게 이는 '자기 관찰 일기'가 아니라

'행동의 교정'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화내는 순간 '왜 화가 났는가'를 캐물으며

본능적 반응을 끊어내는 훈련.

 

타인을 판단하기 전에

'내 기준은 절대적인가'를 묻는 습관.

 

이런 사소한 실험이 쌓일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이중성을 마주한다.

 

 

자기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기 인식을

'영혼의 눈 뜸'이라 불렀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나의 약점뿐 아니라, 타인의 고통이다.

 

'나'를 제대로 아는 자만이

'너'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족 문제, 직장 갈등,

사회적 논쟁 -모든 인간관계의 핵심은 결국 자기 해부에 달려 있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들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는 체하지 말라."

현대인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는 이제 질문이 되어야 한다.

 

"당신은 정말 자신을 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알고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가?"

 

착각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삶은 투명해진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는 델포이 신전 벽 앞에 선 소크라테스다.

무지의 바다를 항해하며, 오직 의문만이 등대가 된다.

 

---------------------------------------------------------------------------------

 

Chopin. Lara Melda. Carducci Quartet.

https://youtu.be/tIO6vHjVCWc?si=HUT2WbhPT1CrLpfx

 

반응형

'명상&쉼터 > 인생명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체의 경고 2  (0) 2025.06.11
시련의 경제학  (1) 2025.05.30
쇼펜하우어의 진리  (1) 2025.05.28
묘비명  (0) 2025.05.27
플라톤의 꿈  (0) 2025.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