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11. 17:16ㆍ명상&쉼터/브런치스토리
빗속에 스민 그대의 노래
비가 내리는 금요일 저녁 퇴근길, 신호등이 붉은 눈을 깜빡인다. 차량 FM 라디오에서 흐르는 이문세의 ‘옛사랑’이 스피커를 타고 공허를 채운다.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내맘에 둘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대로
내버려 두듯이"
노랫말이 창문에 맺힌 물방울을 타고 흐려진다. 와이퍼가 좌우로 젓는 박자에 맞춰 어둠이 밀려오고, 핸들 위에 놓인 손가락이 저절로 오래된 상처를 어루만진다.
첫사랑은 비처럼 내린다
그날도 비가 내렸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강한 어조로 말했다.
“형, 술 한 잔만 사 주세요”
카페 안의 잔잔한 재즈 음악과 빗소리가 뒤섞여 어색한 공기를 연주했다. 그녀가 잔을 들이키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부모의 이혼, 오빠의 가출…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파묻힌 상처들을 털어놓는 그녀의 어깨는 가느다랗게 떨렸다. 나는 말없이 눈물을 닦아줄 뻔한 손을 주먹 쥐며 참았다. 차마 건네지 못한 손수건은 주머니 속에서 축축해졌다. 그렇게 우리의 첫사랑은 눈물로 시작되었다.
이문동에서 잠실까지 그녀를 데려다 주는 택시 안에서 우린 뜨거운 젊은 청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라디오에선 이문세의 첫사랑의 노래가 흘렀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잠실까지 달렸다. 그녀는 차창에 하트 그림 속에 "FOREVER" 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그땐 몰랐다. 영원이란 단어 자체가 이미 과거형이라는 걸.
이별은 조용한 번개다
매일 아침 도서관 3층 창가 자리. 어느 날부터 그녀의 책장 사이로 스민 커피 향이 내 책을 적시던 자리가 차갑게 식었다. 취업한 나는 회사가 바쁘다는 이유로 그녀와의 만남이 짧아졌고, 그녀 역시 하루의 한번 전화도 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결국 퇴근 길마다 만나던 카페엔 그녀가 남겨둔 머그잔만이 우리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들려 온 그녀의 약혼 소식. 우리가 이미 마지막 대화를 나눈 뒤임을 깨달았다. 천둥 없는 번개처럼, 사랑은 소리 없이 타버렸다.
빗소리는 영원히 맴도네
첫사랑의 상처는 터진 수채화 물감 같다. 아무리 덧칠해도 원래 색깔이 드러난다. 오늘, 차 안에서 다시 ‘옛사랑’이 흐른다. 신호등이 녹색으로 변했지만 발을 뗄 수 없다. 비로 씻겨 내려가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인 것 같아서. 뒷차의 경적 소리에 정신을 차리며 창문을 열자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을 스친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라는 가사가 빛과 어둠 사이를 맴돈다.
나는 라디오 주파수를 돌렸다. 다른 곡으로 바꾸려던 손가락이 유난히 무거웠다. 그때 이미 집을 지나쳐 버린 뒤였다. 나는 핸들을 돌렸다. 빗길을 달리는 타이어 소리가 그녀의 옛 웃음소리와 겹친다.
첫사랑이란 이름모를 풀과 같다. 뿌리를 뽑으려 할수록 더 울퉁불퉁한 흙덩이가 달라붙지만, 그 흙을 털어내면 비로소 꽃잎이 드러난다.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날 그녀가 준 CD에 들어있던 노래들이, 단지 추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나를 위한 위로 편지였음을.
비가 그치고 창문에 서리가 내린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새기려다 멈춘다. "영원" 대신 "고마워" 를 쓴다. 햇살이 닿으면 이 글자도 강물이 되어 흘러가겠지. 하지만 그 흔적이 남긴 습기만큼은 영원히 이 자리에 머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