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파편

2025. 3. 28. 17:39명상&쉼터/브런치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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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는 시간의 언덕

인간은 기억의 동물이다. 머리칼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어렴풋이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풍경, 사랑하는 이의 온도까지. 기억은 우리를 오롯이 로 있게 하는 밑바탕이지만, 동시에 발목을 잡는 무게이기도 하다. 특히 아픈 기억은 모래시계 속 모래알처럼 가라앉았다가도 조금만 뒤집히면 다시 쏟아진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처럼 우리도 끝없는 반복의 언덕을 오르내린다. 돌을 산꼭대기까지 밀어올렸다고 믿는 순간, 그것은 다시 발밑으로 떨어지고 만다. 과거의 실수와 상처도 마찬가지다. 잊으려 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역설.

 

돌을 굴리는 이유

시지프스는 왜 벌을 받았을까. 신을 조롱했고, 죽음을 속였으며, 끝없는 교만으로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벌은 단순히 돌을 밀어올리는 육체적 고통이 아니다. 매번 성공 직전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절망, 그 순간을 영원히 체험하게 하는 정신의 굴레다.

 

우리의 아픈 기억도 비슷하다. “이번엔 달라질 거야라며 애쓰지만,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거나 예전 상처가 되살아날 때마다 시지프스의 한숨이 귓전에 맴돈다.

 

과거에 집착하는 마음은 미래의 문을 닫는다. 실패한 경험을 되씹으며 새로운 도전을 망설일 때, 우리는 이미 돌을 발밑에 둔 채 힘없이 주저앉은 시지프스와 다르지 않다.

 

왜 그랬을까

라는 자문은 반성의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지나치면 현재를 희생시키는 굴레가 된다. 어제의 나를 끌어안은 채 오늘의 내가 숨 쉴 틈을 잃는 것이다.

 

돌을 내려놓는 법

그럼에도 시지프스 신화에 감동받는 이들은 그의 끈질긴 몸부림에서 희망을 읽는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스는 행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유를 찾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상처의 돌을 영원히 멈출 수는 없지만, 그것과 공존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첫 번째는 의미 재편성이다. 과거의 실패를 미완성이 아닌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했던 시지프스가 돌을 밀며 땀방울을 닦는 순간, 그는 자신의 노동에 의미를 부여했을지 모른다.

 

이 돌은 내가 존재하는 증거라며. 아픈 기억 역시 그때 버텨낸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구나라면, 돌이 언덕을 구르는 궤적과 발자국으로 보일 것이다.

 

두 번째는 의식적 망각이다. 기억은 선택이다. 머릿속 재생 버튼을 계속 누르는 건 자신이다. 어두운 밤 창가에 앉아 과거의 영상물을 재생할 때면, 문을 열고 별빛이 쏟아지는 마당으로 나서보라. 새로운 풍경은 기억의 초점을 자연스럽게 옮긴다. 일기에 쓴 아픈 이야기를 태우는 의식도 좋다. 불꽃이 종이를 삼키며 하늘로 흩어지는 모습은 물리적 상징으로 마음의 무게를 덜어준다.

 

세 번째는 시간의 창조. 시지프스의 돌이 언덕을 오르내리는 시간은 순환적이지만, 인간의 시간은 직선이다. 과거에 매몰되면 순환의 늪에 빠지지만, 새로운 경험을 쌓으면 직선의 화살표가 전진한다. 평소 가보지 않은 길로 출근해보고,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며 미지의 감각에 몸을 맡겨보라. 익숙한 기억의 패턴을 깨는 행위는 뇌에 신경회로를 새로 그린다.

 

그럼에도 돌은 구르겠지만

물론 모든 시도가 완벽한 해답은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옛 상처가 되살아나 눈물이 뚝뚝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시지프스의 이야기를 떠올리곤 했다. 그는 돌을 영원히 밀어야 하지만, 그 언덕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매순간 새롭다. 구름의 그림자가 달라지고, 바람 소리가 변하며, 돌의 표면에 이끼가 자라기도 할 것이다.

과거의 무게를 완전히 버리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그 무게가 발을 묶는 사슬이 아니라 발걸음을 만드는 중력이 되도록 노력할 뿐이다. 아픈 기억이 찾아올 때면 이렇게 속삭여보라.

 

네가 있는 곳까지 나는 이미 올라왔어. 이제는 내려가는 길도 걸어볼게.”

 

언덕을 오르내리는 과정 자체가 삶이라면, 우리는 그 길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품고 천천히 내딛어가면 된다.

 

기억의 돌을 산꼭대기에 영원히 두지 못해도 괜찮다. 어차피 인생의 언덕은 끝이 없으니까. 중요한 건 돌을 밀며 보는 노을이 아름다웠다는 사실, 그걸 잊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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