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2025. 5. 1. 14:43명상&쉼터/브런치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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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아침,     

창문 밖으로 스며드는 빗소리가 알람 시계보다 먼저 나를 깨운다. 

아직 새벽 회색이 실내를 스르르 덮고 있는데, 

벽걸이 시계 초침의 떨림만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증명한다.      

 

퇴직한 지 벌써 두 달. 아침마다 달려야 했던 지하철, 

회의록에 적힌 미팅 시간, 

계속 울려 대던 메일 알림—

그 모든 것들이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오늘은 근로자의 날. 

비가 내린다.     

커피포트가 끓는 소리를 들으며 난 창가에 기대어 서 있다.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들이 흐르다 마르고, 

다시 흐르다 마르기를 반복한다.      

그 경로가 마치 누군가의 인생 같다. 

굵었다 가늘었다 하는 빗줄기 사이로 멀리 아파트 단지의 형체가 

흐릿하게 비친다. 

 

발아래로는 어제 읽다 만 책이 펼쳐져 있고, 

책장 사이로 낀 오래된 편지 한 장이 스르르 미끄러진다. 

손글씨로 쓴 그 편지는 아내가 예전에 남겨둔 것이다. 

"무리하지 말고 쉬어도 돼"라는 문장에 머뭇거리던 

그때의 내가 문득 겹쳐진다.  

  

 

 

 

옷장 위에 놓인 회사 출입증은 먼지가 앉아 있다. 

플라스틱 표면에 새겨진 내 사진은 

아직도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그 옆에 놓인 거울 속의 나는 머릿결에 

은빛이 더 많이 묻어난 모습이다. 

 

비가 내리면 항상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 

학교 가기 싫어서 비 맞으며 울던 날. 

아버지가 우산을 들고 찾아와 내 머리를 토닥였던 그 손길. 

지금은 내 어깨 위에 놓인 빗물의 무게가 그 감촉을 대신한다.     

 

발코니에 걸려 있는 빨랫줄에 맺힌 빗방울들이 투명한 구슬로 변한다. 

빨래를 걷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이 비가 주는 여유를 망칠 수 없어 손을 뗀다. 

차분히 내리는 빗소리는 마치 잊혔던 음악을 연주한다. 

클래식 기타의 산뜻한 선율처럼, 

때론 첼로의 깊은 울림처럼. 

 

 

 

 

이 소리에 맞춰 책상 위에 놓인 화분의 식물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퇴직 후 처음으로 키우기 시작한 아이들이다. 

물을 주다 보면 잎사귀 하나하나에 생명의 파문이 전해지는 듯하다.     

 

냉장고를 열어 어제 사 온 빵을 꺼낸다. 

아직 따뜻함이 남아 있는 듯한 착각에, 

한 입 베어 물면 수분 가득한 공기가 입안 가득 퍼진다. 

 

아내는 아직 침대에 누워 있다. 

그녀의 잠든 얼굴을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30년 동안 내가 회사로 뛰어가는 동안, 

그녀는 이 창가에서 몇 번이나 비를 바라보았을까. 

오늘은 내가 그 자리에 서 있어 준다.     

 

빗물이 모여 도로 위에 그린 그림은 수채화의 번짐 같다. 

지나가는 자동차의 깜박이는 방향등이 붓질로 그려낸 노란색, 

빨간색 물감이 되어 흩어진다. 

 

우산을 쓴 행인들이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나에게 이 비는 서두를 이유 없는 여백이다.      

전화기에는 아들의 문자가 와 있다. 

 

"비 오는데 허리 조심하세요." 

 

그 작은 배려가 창밖을 적시는 빗방울보다 따뜻하게 옷깃을 적신다.     

점심이 가까워져도 비는 그칠 기미가 없다. 

 

 

 

 

난 여전히 창가에 앉아 커피 잔의 온기를 손바닥에 담고 있다.      

지난날의 급한 물결 속에서 놓쳤을 것들 

- 이 빗소리, 이 고요함, 이 작은 습기 - 이 이제야 내게로 스며든다. 

시간은 강물이 아니라 빗물인가 보다. 

땅속으로 스며들어 뿌리를 적시고, 

언젠가 하늘로 돌아가 다시 내려올 테지.     

 

비 그친 뒤 햇살이 나무 잎사귀의 물기를 닦아 줄 때쯤, 

나는 이 여운을 페이지에 묻혀 두기로 한다. 

오늘의 빗방울이 책갈피가 되어, 

다음 번 비 오는 휴일 아침에 다시 펼쳐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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