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박사 2025. 6. 9.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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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죄는 아니지만 죽을 때까지 가난한 것은 죄다."

 

빌게이츠의 말은 겨울 추위처럼 차갑게 파고든다.

공포영화의 주인공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방울보다

더 침묵을 깨우는 소리다.

 

모진 바람이 휘몰아치는 계절,

강한 풀은 그제야 모습을 드러내듯,

인간 역시 고통을 겪어야 비로소 눈을 뜬다.

부귀와 빈천 사이에 놓인 세상은 앎과 모름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누구나 행복을 좇지만,

그 끝이 결국 억압된 이성의 유산으로 남을 뿐임을 깨닫지 못한 채 달려간다.

가난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태양이 지면 그 존재가 더욱 선명해진다.

 

 

부자와 빈자, 이름의 무게

 

“지식은 힘이다(Knowledge is power).”는 명언을 남긴

프랜시스 베이컨은 36세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법률 고문이 되던 해,

젊은 의원들을 불러 모았다.

 

"부자가 무엇이오?"

 

돈, 재산, 권력 - 답은 예측 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경고했다.

 

“부를 경멸하는 자,

그것은 부자가 될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를 경멸하는 자들의 말을 결코 믿지 마세요.

결국에는 부를 얻는데 실패한 자가 부를 경멸할 테니까요.”

 

그의 말은 칼날 같았다.

부를 향한 욕망을 부정하는 이들의 이면에 깔린 실패를 꿰뚫는 통찰.

그러나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부의 본질을 놓치고 만다.

부는 힘이자 동시에 덫이 될 수 있으니.

 

베이컨이 말한 ''Knowledge'가 부의 통로라면,

그 통로는 결국 인간의 욕심이 파놓은 협곡이 되기도 한다.

부를 좇는 자와 부를 저주하는 자 사이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하는가.

 

 

 

 

가난의 얼굴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에서 가난을 두고 말했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는데, 이건 진리다.”

 

굶주림이 영혼을 휘감을 때, 고결함은 먼지처럼 무너진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가난이 빚은 좌절감으로 살인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다.

그의 내면은 빈털터리처럼 텅 비었고,

그 공허함은 도덕마저 삼켜버린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던 아마르티아 센은 더욱 차갑게 정의한다.

 

"가난은 가능성의 죽음이다."

 

돈이 없는 것이 아닌,

꿈꿀 권리마저 앗아가는 것.

가난한 자의 일상은 법률의 지뢰밭을 헤매는 것과 같다.

공적부조(公的扶助)를 받는 손길조차 의심받는 세상,

디킨스가 말한 "숨길 수 없는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한 사회가 빈자를 향해 던지는 시선은,

그들을 가난의 감옥에 가둬두는 또 다른 족쇄다.

 

 

대물림되는 어둠

 

가난은 유전된다.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에 나온 빈 손 그릇처럼,

공허함은 대를 이어 채워지지 않는다.

올리버가 구걸하는 죽 한 그릇은 세상의 냉대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죽 그릇은 닦을 필요가 없었다.

아이들이 숟가락으로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깨끗이 긁어먹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가난의 대물림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카뮈는 이 연쇄를 "발버둥 칠수록 깊어지는 늪"이라 했다.

 

가난한 시간은 공유되지 않는다.

각자의 고통은 고립되어,

거짓 희망으로 얼룩진 채 끝없이 반복된다.

그것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유한한 삶을 무한한 절망으로 가두는 장치다.

 

부모의 빚을 물려받은 아이,

개근거지라고 놀림받는 아이,

 

그들의 발걸음은 이미 무거운 사슬에 묶여 있다.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현대는 맨주먹으로 일어서던 시대가 아니다.

지식이 자본이 되고,

자본이 지식을 삼키는 세상.

누구나 '탁월함'이라는 이름의 경쟁에 내몰리지만,

그 출발선은 천차만별이다.

 

온라인 강의 하나로 부를 일굴 수 있다는 환상은,

인터넷 접근조차 어려운 이들에게는 잔인한 조롱이다.

황홀한 부유는 눈부시게 반짝이지만,

'황홀한 가난'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난은 나이처럼 드러나고,

사랑처럼 아프되,

결코 아름다워질 수 없는 것.

 

그러니 부유의 뒤를 쫓기보다,

가난의 뿌리를 캐는 것이 낫다.

오늘의 한 끼를 걱정하는 이들이

아직도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외면할 수 있는가?

 

디지털 시대의 빈부 격차는 더욱 치명적이다.

데이터 한 줄 없는 이들은 AI가 판단하는 사회에서 투명인간이 된다.

그들의 신음은 알고리즘 속에 묻힌 채 사라진다.

 

병든 몸은 약으로,

상한 마음은 신앙으로 다스린다지만,

가난은 고칠 처방이 없다.

 

재산이 많아도 야비함에 물들면 졸부요,

지성이 없으면 빛을 잃는다.

가난은 고독을 키워 가족을 옥죄고,

부는 권력을 물려주며 빈자는 시련을 남긴다.

 

도시의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그늘진 골목에서는 여전히 생존을 위한 전쟁이 펼쳐진다.

우리는 그 전쟁을 외면하며 편안함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디킨스의 그 그릇처럼—

빈자리는 반질반질 닦여 빛나지만,

채워지지 않은 허기만이 영원히 남는다.

 

가난이 죄라면,

그 죄의 대가는 사회 전체가 치러야 할 것이다.

황혼이 질 때마다 드리우는 그림자를 마주하며,

우리는 어디로 걸어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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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녹턴 20번

https://youtu.be/0aqt3FLqd84?si=pYuedOCIlV_Qx-p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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