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존재
가족이라는 이름의 우주
가족은 태양계와도 같다. 각자 고유한 궤도를 그리며 돌아가지만, 보이지 않는 중력으로 묶여 있다.
때로는 너무 가까워져 충돌할 뻔하고, 때로는 멀어져 고독의 우주를 헤매기도 하지만, 결국 같은 별자리 아래로 돌아온다.
가족이란 혈액보다는 시간이 빚은 동행이며, 유전자보다는 상처가 엮어낸 공동체다. 그 굴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처럼 우리를 조여오지만, 동시에 추락하지 않게 붙잡아주는 안전줄이 된다.
자유와 속박의 이중주
어머니는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았다. 아버지의 못다한 몫까지 하고자 새벽닭보다 먼저 출근하고, 자정이 넘어 귀가하는 그녀의 모습은 '희생'이란 단어로 압축되었다. 어느 날 그녀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내 인생은 너희들밖에 없어"라고 말했다.
그 순간 그녀의 목소리에서 자랑스러움과 동시에 쓸쓸함이 묻어났다.
가족의 굴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사랑이 의무로 변주되고, 헌신이 습관이 되어 우리를 옥죄 오는 순간.
하지만 그 굴레가 없었다면 우리는 흩어져 홀로 서 있을지 모른다. 굴레는 동시에 구원이다.
부모의 기대, 형제의 경쟁, 자식의 의무감-이 모든 것들이 서로를 가르며 피를 나눈 것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기지만,
그 상처들이 겹겹이 쌓여 비로소 '가족'이란 지층을 이룬다.
존재의 예술
결혼식장에서 엄마는 여동생의 손을 잡으며 당부한다.
"이서방이 못되게 굴면 언제든지 집으로 와라. 너는 영원히 내 딸이다“
그녀의 말은 가족 관계의 본질을 드러낸다. 가족은 언제 어디를 가든 지워지지 않는 정체성의 첫 각인이다.
그러나 가족 안에서 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고독한 예술이다.
어린 시절, 식탁에서 나와 동생이 갑론을박하며 치고 박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엄마는 "싸우더라도 밥은 같이 먹어야지"라고 말한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 다른 음으로 노래할 자유 - 그것이 가족 공동체를 지탱하는 힘이다.
서로의 그림자를 밟아도 같은 길을 걷는 이유는, 그 길 끝에 각자의 해가 지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를 품은 별처럼
가족은 미완성 작품이다. 부서진 조각들을 주워 모아 다시 붙이다 보면 원래 형태와는 전혀 다른 모양이 되어버리지만,
그래서 더 아름답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처럼, 우리는 '가족-내-존재'로 살아간다.
그들에게서 벗어나 독립하는 것이 성숙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있되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 진정한 자유임을 배운다.
굴레를 벗어 던지려 발버둥치는 순간, 우리는 오히려 그 굴레가 지탱해주던 무게를 깨닫는다.
가족이란 결국 서로의 무게를 나르는 연대의 이름이다. 홀로 설 수 있는 강인함과 함께 흐를 수 있는 유연함 사이,
그 긴장감의 한가운데서 가족은 별처럼 반짝인다. 우리는 영원히 그 빛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비록 발걸음이 엇갈려도,
그 길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으니.
”결국 가족이다
영웅 아니라 영웅 할배라도
마지막 순간 돌아갈 제자리는
결국 가족이다
대문 밖 세상에서의 상처도
저마다의 삶에 패어 있는 흉터도
심지어 가족이 안겨 준 설움조차도 보듬어 줄
마지막 내 편
결국 가족이다“
- 응답하라 1988 대사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