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박사 2025. 4. 5.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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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갈수록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사귀들은 서로를 떠나보내듯이 하나둘 흩어진다. 붉고 노란 빛깔로 물들었던 화려함도 이젠 시들어갈 시간이다. 바람이 스치면 낙엽은 흩날리다 결국 땅에 닿고, 발아래 쌓인 잎더미는 촉촉한 썩은 냄새를 풍긴다.

 

계절의 순리라지만, 어쩐지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은 인간관계의 단절과 닮아 있다. 서로를 지탱하던 힘이 약해지는 순간, 관계도 낙엽처럼 무너져내리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가족, 친구, 연인, 직장 동료그물처럼 얽히고설킨 연결고리들 사이에서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고, 의지하고,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중 가장 아프게 남는 상처는 배신이다. 사랑과 믿음으로 쌓아 올린 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땅속 깊이 파묻힌 씨앗처럼 얼어붙는다.

 

강등당한 마음

내가 60평생을 살아 오면서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손꼽아 보면 의외로 많다는데 스스로 놀랬다. 고교 시절 어려웠던 친구를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하도록 해주었고 어머니는 그 친구 도시락까지 싸주었다. 그런데도 특별한 일이 없었는데도 그 친구는 어느 날부터인가 다른 친구들에게 내 험담을 하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는 동정받는 다는 열등의식의 발로였다고 짐작된다.

 

특히 우리는 연인관계에서 배신한 소설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 잘 알고 있다. 연인 간의 배신에 대해 얘기할 때 '이수일과 심순애' 스토리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심순애의 속내와 그녀가 처한 상황이 어찌 됐든 지고지순한 사랑을 버리고 장안 갑부를 선택한 건 이도령을 마냥 기다리는 춘향이가 알면 까무러칠 선택이 아닌가 싶다. 개천에서 용 나기가 힘든 요즘엔 경성제국대학에 다니고 집안마저 빵빵한 이수일을 선택한 것은 당연 하다고 생각이 들지 모른다.

 

사회에선 더 많은 배신들이 판을 친다. 단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동료든, 동업자든 가리지 않고 등 뒤에서 비수를 꽂는다.

 

배신의 이유

낙엽이 지고 첫 서리가 내리면, 땅속에 묻힌 씨앗들은 알 수 없는 긴장에 휩싹인다. 겨울을 버티기 위해 뿌리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얽히고, 어떤 것은 얼어붙고 어떤 것은 썩어간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배신이라는 쓴 열매는 단순히 악의에서만 자라지 않는다. 그보다 더 복잡한 심연에서 싹튼다. 두려움, 욕망, 나약함, 혹은 사랑조차도 그 씨앗을 키운다.

 

첫 번째 뿌리는 이익이다. 자신의 이익이 커 보일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발버둥 친다. 한 친구가 회사에서 나를 배신했던 이유를 오랜 후에야 알게 됐다. 그는 노조를 결성할 때 끼워 주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오히려 그 동료를 보호하고자 했던 일인데 전후 사정도 들어 보지 않고 오해를 한 모양이다.

 

상사에게 그 동료는 밀고를 했다. 팀내 동료이지만 경쟁자였던 나를 제거할 좋은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결국 그 동료가 대리로 승진했다. 이익을 위한 배신은 선악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욕망과 나약함은 더 치명적이다. 내가 공공기관의 장으로 있었을 때, 기관을 관리 감독하는 공무원이 승진의 욕망 때문에 헛소문을 퍼뜨린 적이 있다. 그 소문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 여직원을 사주하여 성희롱 사건으로 조작하였다. 결국 발각되어 그 공무원은 옷을 벗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건, 그 공무원은 가정에서 버림받는 외로움에 시달렸다는 사실이었다. 나를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덮으려 했던 나약한 심리와 상대적 우월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욕망 때문이다. 배신의 날카로움은 상대를 향하기 전, 이미 자신의 가슴에 꽂힌 채 출발한다. 그리고 그 칼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 온다.

 

겨울의 긴 터널

배신의 아픔은 겨울처럼 길게 찾아온다. 차갑고 긴 터널 속에 갇힌 기분이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도 닿는 건 허공뿐이다. 신뢰란 이름의 쇠사슬이 무너지면, 그 조각들은 전부 독이 된다. 한참 동안 일도 일상생활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상처는 꽤 길게 간다.

 

하지만 겨울이 영원하진 않다. 어느 날 문득, 배신의 얼음이 눈물로 녹기 시작한다. 황혼이 짙게 깔린 어느 날 모든 것을 돌아보며, 내 안에 서렸던 욕심을 발견했다. 나의 알량한 욕심이 그들의 배신을 불러 온 것은 아닌지?

 

직장 동료와의 갈등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배신에 분노했지만, 정작 나 역시 그를 믿지 않았던 건 아닐까. 신뢰는 상대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묻는 질문이었다.

 

배신은 상처이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이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힘들었지만 그 배신은 나를 더 강하게 세웠다.

 

새 잎을 기다리며

이제 낙엽이 떨어진 자리에 새싹이 트는 계절이 온다. 배신의 상처는 아물며, 그 자리엔 단단한 혼잣말이 자란다. “남을 원망하지 말고, 너 자신을 지켜라.” 모든 관계가 완벽할 순 없지만, 부서진 조각들을 줍는 손길에 마음의 온도를 담을 수는 있다. 배신의 계절이 끝나면, 우리는 조금 더 성숙한 나무로 자라있을 것이다. 단풍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떨어진 잎은 뿌리가 되어, 다음 봄을 위한 밑거름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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