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쉼터/브런치스토리

자식, 그 경계 위의 삶

찐박사 2025. 4. 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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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오후, 창가에 앉아 손녀의 그림을 지켜보던 할머니가 문득 말했다.

 

너는 그림 그리는 게 즐거우냐?”

 

손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니도 어렸을 땐 화가가 꿈이었단다.”

 

그 말에는 평생 품어온 아련한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손녀의 크레파스는 순간 주저앉았고, 그림 속 꽃잎은 갑자기 무거워져 버렸다.

어른들의 미완성된 꿈은 종이비행기처럼 자식들의 어깨에 착륙한다. 날개를 접힌 채.

 

자식이란 유령 같은 존재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모든 탄생은 기적이라 말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우주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비를 가장 가깝게 체현하는 장소다.

그러나 이 기적 같은 시작이 때로는 투명한 감옥이 된다.

부모는 자식 속에서 자신의 흔적을 찾고, 자식은 그 흔적을 뒤집어 놓는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라캉은 단순히 자신의 필요나 충족에서 비롯되지 않는다오히려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형성하고, 그 욕망을 추구한다.”이라고 분석했지만, 부모의 욕망이 자식의 욕망을 삼켜버릴 때 이 관계는 기이한 모순에 빠진다. 피 한 방울로 이어졌다는 이유로,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의 인생 설계도가 되어야 한다는 역설.

 

피아노 학원 앞에서 울며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를 보며 생각했다. 과연 그 아이의 눈물은 사이의 음계를 부정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머니가 스물일곱에 포기한 콩쿠르 출전 표를 거부하는 것일까.

자식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아버지의 이름’(Nom-du-Père)을 둘러싼 투쟁이다.

정신분석학의 거울 단계처럼, 부모는 자식 안에서 자신의 반쪽 영혼을 발견하고 그 반쪽을 완성하려고 안달한다.

하지만 자크 데리다가 말한 차연(差延)의 개념처럼, 이 욕망은 영원히 미뤄지고 틈새가 생겨난다.

 

대리만족의 함정에 빠진 사랑

 

아내와 가깝게 지내는 지인이 하루는 딸이 로펌 합격 소식에 한턱낸다고 연락이 왔다. 딸을 통해 아빠의 꿈을 이룬 지인은 이게 진짜 사랑이고 효도지.” 라며 거하게 한턱을 쏘았다.

그러나 변호사가 된 그 딸은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부모의 사랑이 가장 위험한 형태로 변질되는 순간은, 자식을 자신의 연장선으로 보는 눈빛에서 시작된다.

독일의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문명화 과정에서 감정의 억압이 문명을 만든다고 주장했지만,

자식에 대한 집착은 문명 이전의 원초적 충동으로 남는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데달로스는 아들 이카루스에게 날개를 달아주며 태양에 가까이 날지 말라경고했다.

하지만 그 경고가 이카루스를 하늘로 내몬 역설. 부모의 금지(禁忌)는 때로 가장 교묘한 유혹이 된다.

 

2023년 한국교육개발원 조사에 따르면 10대 중 68%부모의 기대가 나를 옥죈다고 답했다.

그들이 외치는 SOS는 단순한 반항이 아니다. 생의 주체성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아이는 부모의 자아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되는 신세가 되어서는 안 된다.

 

홀로 서야 할 생명체에게 바치는 자유

 

어느 봄날, 7년째 그림을 배운 딸이 물감을 던지며 말했다.

 

엄마, 나 이제 그림 안 배울래.”

 

아내의 얼굴에 번쩍이는 것은 실망인가, 경이인가. 이 순간이 진정한 부모성의 시금석이다.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 "나는 나와 나의 상황이다 - Yo soy yo y mi circunstancia”이라 말했지만,

자식은 부모의 환경이 아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나르시시즘의 작은 차이를 인정할 때, 비로소 사랑은 예술이 된다.

 

고요한 적요(寂寥)가 필요한 이유다.

나는 아내의 작업실을 수놓은 장미 꽃잎이 떨어질 때마다 새로운 봉오리가 피어나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

 

아이는 내가 키우는 꽃이 아니라, 내게 길을 알려주는 별이라는.

 

자식의 인생은 부모의 미완성 악보를 위한 후렴구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 되어야 한다.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듯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라는 비유처럼.

 

해방의 순간을 위하여

 

요즘 유행하는 나르시시즘 양육법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영화 컨택트에서 주인공이 말한다.

 

우주는 생각보다 더 큰데, 우리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진 않아.”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조지 버나드 쇼의 유머 있는 경고처럼,

부모란 자식들이 인생이라는 전쟁터에 투입되기 전에 적진 한가운데서 밥이나 챙겨주는 역할일 뿐이다.

 

미술관에서 본 한 설치 작품이 떠오른다. 투명 실크로드로 연결된 두 유리상자. 한쪽에는 어머니의 구두가, 다른 쪽에는 딸의 운동화가 놓여 있다. 작품 제목은 서로의 길을 밟지 말라. 이 부드러운 경계선이야말로 진정한 세대 간 사랑의 형태다. 부모는 자식을 향한 사랑을 그저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로 승화시켜야 한다.

 

석양이 창가로 기울 때, 할머니는 손녀의 그림을 들고 말했다. “이 꽃밭에 할머니가 걷지 못했던 길이 보이네.” 이번엔 그림 속 꽃잎들이 살짝 일렁였다. 바람이 아니라, 자유로움에 대한 기쁨의 율동으로.

 

자식이란 결코 우리의 꿈을 담아둘 유리병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빛으로 세상을 비출 프리즘이다.

부모의 미완성 꿈을 자식에게 주입할 때, 우리는 그들을 살아있는 박제로 만든다.

하지만 함께 꿈의 조각을 모아 새로 조합할 때, 비로소 진정한 유산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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