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쉼터/브런치스토리

운명의 강물 속에서

찐박사 2025. 3. 23.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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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는 종종 창가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왜 나는 이런 집안에 태어났을까?"

 

교실에서 옆자리 친구가 연필이 아닌 샤프펜슬을 쓰는 모습을 보며, 초콜릿 우유 한 병을 나눠 마시던 동생의 웃음을 떠올리며. 그날의 햇살처럼 따갑던 의문은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에 서린 안개처럼 자리잡고 있다.

 

인간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수많은 줄다리기의 중심에 선다. 어떤 이는 금빛 포대기에 싸여 온갖 가능성의 문이 활짝 열린 채 세상에 내던져지고, 누군가는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운 현실 위를 맨발로 걸어야 한다. 신이 있다면 이 불공평한 출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저마다의 인생 퍼즐에 꼭 맞는 조각으로 태어나는지도 모르겠다. 가난이 주는 결핍이 오히려 마음의 풍요를 키우는 비옥한 흙이 되거나, 풍부한 물질이 영혼의 빈곤을 드러내는 거울이 되는 역설 같은 것.

 

역사책 속 위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패턴이 보인다. 연금술사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뉴턴, 귀족 집안의 반열에 있던 톨스토이. 그들이 맞닥뜨린 운명의 수수께끼는 서로 다른 모양새였지만, 결국 인류라는 큰 그림을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 마치 강의 지류들이 제각기의 길을 걸어 바다로 향하듯, 우리의 삶도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향해 굽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인생은 받은 카드로 플레이하는 게임이 아니라, 그 카드들로 그림을 완성하는 예술이란다."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일생을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아오신 분의 말씀에서 깊은 철학이 스며나왔다.

그분은 쓴맛을 단 것으로 변환하는 연금술을 몸소 실천하시며, 오히려 풍요로운 집안에서 자란 이들이 모르는

행복의 공식을 가르쳐 주셨다.

 

동양의 사주팔자와 서양의 운명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흥미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만약 우리가 태어날 환경을 스스로 선택한다면? 영혼이 세상에 던져지는 실험실에서 각자 극복해야 할 과제를 고르듯, 어떤 영혼은 가난이라는 거친 돌을 다듬는 법을 배우려고 하고, 또 다른 영혼은 부유함이라는 유리구슬을 잃지 않으려는 연습을 선택하는 것은 아닐까.

 

신비주의자들의 '영혼 계약' 이야기처럼, 우리는 서로의 삶을 필요로 하는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지난해 만난 한 노숙자의 눈빛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

그가 들려준 인생 이야기 속에는 황금빛 유년기와 몰락의 쓴맛이 공존했고, 반대로 주변의 한 사업가는 재산을 모두 잃은 후에야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고 고백했다. 이 대비되는 이야기들은 마치 삶의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으려는 자연의 법칙을 보여주는 듯했다.

 

우주의 거대한 설계도 속에서 각 인간의 탄생은 하나의 점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점과 점을 연결하면 예측할 수 없는 기하학적 아름다움이 펼쳐진다. 가난한 집의 아이가 의사의 꿈을 키우고, 부유한 집의 자식이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는 것처럼. 신이 있다면 아마 이 복잡다단한 연결고리 너머에 숨겨진 조화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그 답을 찾으려 하기보다, 질문 그 자체를 품고 살아가려 한다. 마치 강물이 바다를 향해 흐르되 그 과정에서 강둑의 모양을 깎고 모래알을 갈아내듯, 각자의 삶이 서로의 존재를 다듬고 빛나게 하는 여정이라는 것을. 어쩌면 우리는 모두 서로의 거울이며, 서로의 그림자인 동시에 빛이기 때문이다. 태어남의 비밀은 아직 안개 속에 있지만, 그 안개 사이로 비치는 햇살처럼 우리는 서로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배워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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