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효자는 웁니다
후회는 강물처럼
어린 시절 그렇게도 사무쳤던 부모에 대한 미움이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후회의 파편으로 가슴에 박힌다. 세상에 둘도 없는 부모를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핑계로 외면했던 자신의 불효함에 소주 한잔을 기울일 때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회한은 눈물이 되어 술잔에 떨어지며 목 놓아 운다. 부모 살아생전에 좀 더 잘해 드리지 못한 것이 노년의 삶을 슬픔으로 적신다.
어머니를 모시고 1990년대 말쯤 태국으로 온 가족이 여행을 갔었다. 그것이 마지막 효도이자 나의 불효에 대한 위안이다.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면 나는 불효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자책하며 노년을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행을 다녀온 1년 뒤 건강하던 어머니는 갑자기 담도암으로 돌아가셨다. 결국 돌아가신 후 더 큰 후회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부모가 살아 계신 지금 이 순간, 효도를 미루는 이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시간은 결코 당신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 강물처럼
부모의 나이를 묻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머뭇거린다. 숫자로 떠오르는 건 퇴직 나이도, 노년의 고립도 아닌, 그들이 점점 더 ‘부모’에서 ‘노인’으로 변해가는 모습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등에 업혀 별을 보던 밤은 언젠가 내 부축을 받아 걷는 그의 거친 숨소리로 바뀌었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가지만, 그 흐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매일 아침 부모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건, 어제보다 하루 덜 남은 기적 같은 시간인 셈이다.
“내일부터라도 꼭 효도하겠어.”
그 ‘내일’은 결코 오지 않는다. 출근길 전화 한 통은 퇴근 후로 미뤄지고, 저녁 식사 약속은 명절로 미루어진다. 우리는 부모님의 시간이 끝없이 남아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생명의 시계는 보이지 않게 똑딱거리며, 어느 날 갑자기 침묵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내일’이란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깨닫게 된다.
후회는 무덤 앞에 핀 꽃처럼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한없이 울었던 일이 머릿속에 온전히 남아 있다.
"아버지 생전에 드리고 싶었던 양복 값으로 더 좋은 관을 샀어.” 나는 평소에 아버지께 차갑게 대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지금도 눈물을 흘린다. 죽은 사람에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다.
영정 앞에 선 사람들의 눈에서 번지는 후회는, 살아 있을 때 하지 못한 말과 행동이 쌓인 회한이다.
어머니가 요단강을 건너신 후, 나는 그분의 옷장을 정리하다 작은 수첩을 발견했다. 퇴색한 페이지엔 내가 초등학교 때 쓴 글씨로 “엄마, 사랑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옆엔 최근에 추가된 메모가 있었다.
“아들이 바쁜가 보다. 이번 주에도 연락이 없네.”
그 한 줄이 가슴을 후벼 팠다. 살아 있을 때는 늘 곁에 있을 것 같았던 어머니의 빈자리가 이토록 클 줄은 몰랐다.
효도는 화려한 의식이 아니다.
나는 효도를 특별한 날의 큰 선물로 여기며 살았다. 그러나 진정한 효는 화려한 명절 상품 세트나 비싼 요양원 비용이 아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아버지와의 소주 한잔을 내팽개쳤던 일, 어머니가 식탁에 차려놓은 반찬을 흘깃 보며 했던 투정-그 작은 순간들이 쌓여 후회의 태산이 된다.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 손주들에게 남긴 말씀이 있다.
“네 엄마 아빠 발에 손 한 번 씻겨 드려라. 그게 마지막이 될 테니.”
효도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마주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잘 지내시죠?”라고 묻는 것, 저녁에 “오늘 하루 뭐 하셨어요?”라고 전화라도 안부를 전하는 것.
그 사소한 말 한마디가 부모님의 홀로 깊어 가는 노년에 등불이 된다.
지금 이 손이 그립다는 걸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마법 같았다. 배고플 때 주머니에서 꺼내주던 빵, 다친 무릎을 감싸주던 반창고, 첫사랑에 상처받은 밤 어깨를 두드리던 온기.
그런데 어느새 그 손이 우리들의 손을 찾는다.
스마트폰 버튼이 너무 작다고, 병원 약 봉투 글자가 안 보인다고.
그때마다 우리는 “조금만 기다려요”라고 말하며 손을 뿌리친다.
하루는 엄마가 휴대폰 메시지를 보내려다 실수로 사진만 열어 보여준 적이 있다. 화면 속에는 내가 초등학생 때 엄마와 찍은 사진이 가득했다. “네가 자주 보고 싶어서…” 말끝을 흐리던 엄마의 눈가 주름에,
내가 얼마나 그분을 외롭게 했는지 깨달았다. 부모님의 손은 이제 우리의 손을 기다린다. 그 손을 놓치기 전에, 지금 당신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당신의 후회가 시작되기 전에
명절이 다가오면 부모님을 모신 납골당을 찾는다.
“미안합니다, 함께 있을 때 더 잘해주지 못해서…”
영정을 보며 반성의 외침만 남겨 놓고 돌아올 뿐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후회는 헛된 빈손이 된다. 산 사람의 체온, 미소, 목소리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영정 속 사진만이 미소 지을 뿐이다.
오늘 저녁, 부모님 전화번호를 누르라. “잘 지내시죠?”라고 물으러 전화한 것이 아님을 그분들은 이미 알고 계실 것이다. 그저 당신의 숨소리만 들어도 충분하다고. 함께 차 한잔 마시며 옛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라.
효도는 사랑의 마라톤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채우는 릴레이임을 기억하라.
후회의 계절이 오기 전에
눈 내리는 날이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싶어진다. 그 손의 온기가 사라지기 전에, 아버지의 옷깃을 여미고 싶어진다. 효도는 시한부 과제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그들을 대하라.
영정 앞에 서서 “사랑했는데…”라고 속삭이는 대신, 살아 있는 오늘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라.
후회의 눈물은 부모님이 아니라 당신의 가슴에 새겨질 상처임을 명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