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쉼터/브런치스토리

불효자는 웁니다

찐박사 2025. 3. 24.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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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는 강물처럼

 

어린 시절 그렇게도 사무쳤던 부모에 대한 미움이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후회의 파편으로 가슴에 박힌다. 세상에 도 없는 부모를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핑계로 외면했던 자신의 불효함에 소주 한잔을 기울일 때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회한은 눈물이 되어 술잔에 떨어지며 목 놓아 운다. 부모 살아생전에 좀 더 잘해 드리지 못한 것이 노년의 삶을 슬픔으로 적신다.  

 

어머니를 모시고 1990년대 말쯤 태국으로 온 가족이 여행을 갔었다. 그것이 마지막 효도이자 나의 불효에 대한 위안이다.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면 나는 불효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자책하며 노년을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행을 다녀온 1년 뒤 건강하던 어머니는 갑자기 담도암으로 돌아가셨다. 결국 돌아가신 후 더 큰 후회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부모가 살아 계신 지금 이 순간, 효도를 미루는 이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시간은 결코 당신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 강물처럼

 

부모의 나이를 묻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머뭇거린다. 숫자로 떠오르는 건 퇴직 나이도, 노년의 고립도 아닌, 그들이 점점 더 ‘부모’에서 ‘노인’으로 변해가는 모습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등에 업혀 별을 보던 밤은 언젠가 내 부축을 받아 걷는 그의 거친 숨소리로 바뀌었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가지만, 그 흐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매일 아침 부모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건, 어제보다 하루 덜 남은 기적 같은 시간인 셈이다.

 

“내일부터라도 꼭 효도하겠어.”

 

그 ‘내일’은 결코 오지 않는다. 출근길 전화 한 통은 퇴근 후로 미뤄지고, 저녁 식사 약속은 명절로 미루어진다. 우리는 부모님의 시간이 끝없이 남아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생명의 시계는 보이지 않게 똑딱거리며, 어느 날 갑자기 침묵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내일’이란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깨닫게 된다.

 

후회는 무덤 앞에 핀 꽃처럼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한없이 울었던 일이 머릿속에 온전히 남아 있다.

"아버지 생전에 드리고 싶었던 양복 값으로 더 좋은 관을 샀어.” 나는 평소에 아버지께 차갑게 대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지금도 눈물을 흘린다. 죽은 사람에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다.

 

영정 앞에 선 사람들의 눈에서 번지는 후회는, 살아 있을 때 하지 못한 말과 행동이 쌓인 회한이다.

 

어머니가 요단강을 건너신 후, 나는 그분의 옷장을 정리하다 작은 수첩을 발견했다. 퇴색한 페이지엔 내가 초등학교 때 쓴 글씨로 “엄마, 사랑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옆엔 최근에 추가된 메모가 있었다.

 

“아들이 바쁜가 보다. 이번 주에도 연락이 없네.”

 

그 한 줄이 가슴을 후벼 팠다. 살아 있을 때는 늘 곁에 있을 것 같았던 어머니의 빈자리가 이토록 클 줄은 몰랐다.

 

효도는 화려한 의식이 아니다.

 

나는 효도를 특별한 날의 큰 선물로 여기며 살았다. 그러나 진정한 효는 화려한 명절 상품 세트나 비싼 요양원 비용이 아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아버지와의  소주 한잔을 내팽개쳤던 일, 어머니가 식탁에 차려놓은 반찬을 흘깃 보며 했던 투정-그 작은 순간들이 쌓여 후회의 태산이 된다.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 손주들에게 남긴 말씀이 있다.

 

“네 엄마 아빠 발에 손 한 번 씻겨 드려라. 그게 마지막이 될 테니.”

 

효도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마주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잘 지내시죠?”라고 묻는 것, 저녁에 “오늘 하루 뭐 하셨어요?”라고 전화라도 안부를 전하는 것.

 

그 사소한 말 한마디가 부모님의 홀로 깊어 가는 노년에 등불이 된다.

 

지금 이 손이 그립다는 걸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마법 같았다. 배고플 때 주머니에서 꺼내주던 빵, 다친 무릎을 감싸주던 반창고, 첫사랑에 상처받은 밤 어깨를 두드리던 온기.

 

그런데 어느새 그 손이 우리들의 손을 찾는다.

스마트폰 버튼이 너무 작다고, 병원 약 봉투 글자가 안 보인다고.

그때마다 우리는 “조금만 기다려요”라고 말하며 손을 뿌리친다.

 

하루는 엄마가 휴대폰 메시지를 보내려다 실수로 사진만 열어 보여준 적이 있다. 화면 속에는 내가 초등학생 때 엄마와 찍은 사진이 가득했다. “네가 자주 보고 싶어서…” 말끝을 흐리던 엄마의 눈가 주름에,

내가 얼마나 그분을 외롭게 했는지 깨달았다. 부모님의 손은 이제 우리의 손을 기다린다. 그 손을 놓치기 전에, 지금 당신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당신의 후회가 시작되기 전에

 

명절이 다가오면 부모님을 모신 납골당을 찾는다.

 

“미안합니다, 함께 있을 때 더 잘해주지 못해서…”

 

영정을 보며 반성의 외침만 남겨 놓고 돌아올 뿐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후회는 헛된 빈손이 된다. 산 사람의 체온, 미소, 목소리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영정 속 사진만이 미소 지을 뿐이다.

 

오늘 저녁, 부모님 전화번호를 누르라. “잘 지내시죠?”라고 물으러 전화한 것이 아님을 그분들은 이미 알고 계실 것이다. 그저 당신의 숨소리만 들어도 충분하다고. 함께 차 한잔 마시며 옛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라.

 

효도는 사랑의 마라톤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채우는 릴레이임을 기억하라.

 

후회의 계절이 오기 전에

 

눈 내리는 날이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싶어진다. 그 손의 온기가 사라지기 전에, 아버지의 옷깃을 여미고 싶어진다. 효도는 시한부 과제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그들을 대하라.

영정 앞에 서서 “사랑했는데…”라고 속삭이는 대신, 살아 있는 오늘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라.

 

후회의 눈물은 부모님이 아니라 당신의 가슴에 새겨질 상처임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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